필자는 지난 9일과 10일 서울특별시 동작구와 중구에 위치한 두 곳의 고물상을 찾았다. 환하게 떠 있던 해가 저물어가면서 주인을 잃은 수많은 물건이 쌓여가는 동안 하루에도 서너 번씩 고물상을 찾았다 떠났다 반복하는 이들이 있었다. 자신의 몸보다도 몇 배는 무거워 보이는 수레를 끌며 거리를 배회하는, 바로 폐지 줍는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모아온 폐지를 팔기 위해 고물상을 방문하는 순간이 일과 중 유일하게 수레를 내려두는 순간이다. 필자가 그들을 마주했던 양일 모두 최고 기온이 고작 15°C를 웃도는 서늘한 날씨였음에도 그들은 수레를 놓자마자 연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인터뷰를 요청하기 위해 쭈뼛거리며 차가운 이온 음료를 건넸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투박한 손을 내밀며 환한 미소로 답했다.

 

“사랑스러운 손자가 있어 폐지 수집을 관둘 수 없어요”

3년째 폐지 수집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이(66) 씨는 아파트 경비원이었지만 윗선의 부당한 대우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직장생활 중 감내해야 했던 불평등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이 씨는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설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결국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님에도 그는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폐지를 모으는 일 역시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씨는 처음 폐지 수집에 뛰어들었던 2016년 여름을 잠시 떠올린 후 “고물상 인근에 가구거리가 있어서 종이 박스가 많이 배출된다”며 “기존에 폐지를 줍던 이들이 박스를 뺏기지 않기 위해 텃세를 부리곤 했다”고 말했다. 그들과 경쟁 관계에 놓여 싸움이 붙었던 적도 있었다는 이 씨는 당시 한 달간 대략 25만 원밖에 벌지 못했다. 이는 당시 1인 가구 기준중위소득(이전 최저생계비)이였던 64만 9천 9백32원의 1/4도 채 되지 않는 금액이다. 또한 이 씨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12시간 이상 폐지를 줍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시급은 6백94여 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씨는 당시 만 62세였기 때문에 기초노령연금 수혜 역시 불가능했다. 이 씨는 “수입이 너무 적은 나머지 변변한 목장갑 하나 끼지 못하고 물 한 잔도 아껴 마시며 온 동네를 전전했었다”고 회상했다.

최근 상황은 어떠한지에 대한 필자의 물음에 이 씨는 “다른 노인들을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폐지 줍는 일이 익숙해져 속도가 붙었다”며 웃음을 보였지만 “폐지 값이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기 때문에 수입이 크게 상승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폐지 값은 2017년 말까지 1㎏당 1백30원 내외였던 것에 비해 지난해에는 50원으로 그리고 현재에는 40원으로 폭락했다. 이것은 지난해 중국이 자국의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파지를 포함한 24종의 폐기물 수입을 중단한 것으로 인한 여파로 보인다. 그간 고물상에서는 수거한 재활용품을 중국에 팔아 수익을 냈지만 그것이 불가능해지면서 폐지 값을 낮출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 씨는 이런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 채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이 씨가 폐지 수집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바로 8살 난 손자 때문이다. 이 씨는 손자의 사진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1천 원씩 모은 폐지 값으로 내 밥은 굶더라도 손자에게 학용품은 꼭 사주려고 한다”고 손자를 향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 씨에게 손자는 삶의 원동력이자 내일도 모레도 수레를 끌고 나설 수 있는 이유였다. 이 씨는 “현재 가장 큰 목표는 폐지를 팔아 모은 돈으로 중고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하는 것이다”며 “카메라가 생기면 손자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을 사진으로 잔뜩 남겨 손자가 다 자란 후에 보여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폐지 수집도 나에게는 소중한 직업이에요”

고물상이 가까워질 무렵 왜소한 체구의 유(74) 할머니는 무너진 박스 더미를 다시 쌓느라 고군분투 중이었다. 쌓아 올린 박스의 높이가 그녀의 키를 훌쩍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필자와 함께 사태를 수습한 뒤 유 할머니는 고마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몇 번이나 악수를 청했다. 유 할머니의 작은 손을 마주 잡는 순간 그녀의 쾌활한 에너지가 필자에게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올해 처음 폐지 수집을 시작했다는 유 할머니는 아직 폐지를 모을 수 있는 최적의 경로를 확실히 정하지 못해 매일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지친 기색이 전혀 없던 유 할머니는 “처음 가보는 곳에서 수레를 끌고 있으면 폐지를 주우면서 동시에 초행길 산책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즐거워했다. 또한 남성들에 비해 힘이 약해 수레가 꽉 차기도 전에 고물상으로 발길을 돌리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유 할머니는 “남들이 하루에 서너 번 고물상에 들린다면 나는 하루에 대여섯 번씩 들리면 되는 것이다”며 폐지 수집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보여줬다. 더불어 유 할머니는 “그동안 역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적도 있고 식당에서 주방일과 서빙을 맡아 했던 적도 있었다”며 “지금 하고 있는 폐지 수집 일도 나에게는 그것들과 다를 바 없는 소중한 직업이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언제나 밝고 유쾌해 보이는 유 할머니에게도 불과 지난해 칠흑같이 암담한 시간이 있었다. 바로 유 할머니보다 9살이 많은 그녀의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것이었다. 배우자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을 달래기도 전에 유 할머니는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유 할머니는 “남편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신을 원망했고 혼자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두려웠다”며 당시를 회상했지만 “남편이 그리 오래 앓지 않고 갔기 때문에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며 금세 어두워진 분위기를 환기했다.

저녁 8시 무렵 마지막으로 고물상에 들린 뒤 유 할머니는 하루 수입을 세어봤다. 3천 원 남짓한 돈이었지만 유 할머니는 “어제보다 수입이 늘어서 오늘 하루 고생한 보람이 있다”며 “시간이 지나 폐지 줍는 일이 능숙해지면 좀 더 큰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 나이에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로도 감사한 마음뿐이다”고 덧붙였다. 

일과를 모두 마친 유 할머니는 “하루 종일 일을 도와주고 말동무까지 돼준 아가씨에게 작은 보답을 하고 싶다”며 필자를 본인의 집으로 초대했다. 집이 좁으니 밖에서 잠시 기다려달라는 유 할머니의 말에 그녀의 수레에 기댄 채 몇 분이 지났을까 유 할머니는 5백㎖ 생수병에 담긴 냉커피를 건네줬다. “예쁜 잔에 내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아가씨 덕분에 폐지 줍는 길이 평소보다 훨씬 외롭지 않았다”며 손을 흔드는 유 할머니의 모습에서 그녀의 깊은 인정과 활기찬 면모가 엿보였다.

 

“폐지를 줍는 것은 나의 일상이자 취미이기도 합니다”

폐지 줍는 노인들 여럿이 고물상 입구에 모여 있었고 그 사이에서 대화를 주도하는 김(81) 할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김 할아버지는 동네의 노인들 사이에서 굉장한 마당발로 통했다. 실제로 필자가 김 할아버지를 따라나선 이후로 그는 다른 폐지 줍는 노인을 마주칠 때마다 아는 얼굴이라는 듯 반갑게 안부를 주고받았다. 김 할아버지는 가벼운 인사에 그치지 않고 상대의 수입을 묻고 폐지가 많이 나오는 장소를 알려주기도 했다. 또한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으면 김 할아버지는 걱정을 금치 못했다. “오며가며 마주치던 폐지 줍던 친구가 있었는데 평소에도 건강이 많이 안 좋았다”며 “이번 해 들어 한 번도 보지 못해 건강이 악화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고 말했다. 이에 덧붙여 “내게는 폐지를 주우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폐지를 통해 수익을 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전했다.

김 할아버지가 주변 사람들에게 위와 같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른 이들이 김 할아버지에게 보여준 온정 때문이었다. 김 할아버지는 서울특별시 중구의 쪽방촌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이상기후가 심각해지면서 지자체와 여러 기업이 쪽방촌을 찾아 여름에는 얼린 생수를 그리고 겨울에는 핫팩을 무료로 제공했다. 이에 김 할아버지는 “지난해 극심한 폭염과 한파 때문에 폐지 줍는 일을 쉬어야 할지 고민했었다”며 “그때마다 얼린 생수와 핫팩이 집안에서는 물론 폐지를 모으러 다닐 때도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 할아버지가 오랜 시간 폐지를 팔아온 고물상의 주인이 김 할아버지를 기억하게 되면서 고물상 주인은 그에게 여러 배려를 베풀기 시작했다. 폐지 가격이 급락해 폐지 줍는 노인들이 시름을 앓을 때도 해당 고물상에서는 할아버지가 모아온 폐지 무게에 비례한 금액이 아닌 좀 더 큰돈을 내어줬다. 또한 사용하지 않은 채 묵혀두고 있다는 핑계로 할아버지에게 장갑과 양말 따위를 종종 쥐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애정 어린 손길로 생계를 이어올 수 있었던 김 할아버지는 “받는 것의 감사함을 알았으니 이제 주는 것의 즐거움을 찾고자 한다”고 전했다.

김 할아버지는 폐지 수집이 힘에 부치지는 않느냐는 필자에 물음에 “함께 사는 아내도 자식도 없이 몇십 년을 외롭게 보내왔다”며 “폐지 수집을 시작하면서부터 인사를 나누는 지인이 생기고 타인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 행복하게 임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한 “그렇기에 폐지 줍는 일은 힘겨운 생계 수단이기 전에 나의 일상이자 취미다”고 덧붙였다.

 

이 씨는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자에게 학용품을 사주기 위해, 유 할머니는 남편 없이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 김 할아버지는 자신이 경험했던 따뜻한 마음을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은 오늘도 폐지가 실린 수레를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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