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말했다. “내 의지의 원칙이 보편적 법의 원칙이 되게 하라” 칸트의 정언명령은 무조건적이고 선한 동기나 목적에 의존하지 않는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 수단으로 행동하지 않고 조건 없는 의무적인 도덕 행위를 요구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주인공인 아이히만은 칸트의 의무론을 가슴에 새기며 자신의 신념으로 여겼다. 아이히만은 그의 양심이자 법인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 이송을 책임지고 가스실 기차를 만들었다. 아이히만의 의무는 그저 ‘유대인 학살’이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아이히만은 칸트의 의무론을 오해했고 나치 하에서 상부의 명령을 이행하는 데 집중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통찰해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다. 의무 이전에 선행돼야 하는 것은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다만 그의 근면함 속에는 생각하는 능력이 없었고 아이히만은 칸트의 의무론을 가슴에 새겼을 때 어떤 것이 일반적 법의 원칙인지 그리고 히틀러의 말이 일반적 법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생각하지 않았기에 결국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가스실 기차를 고안했을 때 유대인이 어떤 영향을 받을지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가스실 기차로 피해 받을 유대인들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만들었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통해 이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아이히만이 되느냐 마느냐의 경계는 ‘공감’에 달려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개인주의의 심화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회다. 개인주의는 타인과의 경쟁이 심해질수록 심화된다.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내가 그들 위에 설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을 고려할 여력조차 없는 것이다.

얼마 전 숙명여고 전 교무부장이 자신의 쌍둥이 자매에게 시험 문제를 유출하여 불법으로 성적을 올린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이는 쌍둥이 자매의 아버지가 경쟁 사회 속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져 아이히만이 된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날 우리는 아이히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공감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물질적인 것만 추구하다 보면 우리는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에서 봤듯이 아이히만의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되지 않으려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생각하는 능력 즉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계속해서 고취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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