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함의 평판이 예전 같지 않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곳에서 까칠함이란 화합을 저해한다고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까칠함은 좀처럼 미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동체 의식에 환멸을 느낀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까칠함은 하나의 중요한 덕목이 됐다. 까칠함이 오늘날 또 다른 의미의 ‘건강함’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 본성을 억누른다. 그러다 참을성의 한계를 느끼고는 홀로 떠나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떠난 사람도 결국 다시 사람을 찾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꼭꼭 숨은 사람의 삶 속에도 타인으로부터 때가 탄 물건이 즐비하다. 누군가가 만든 냄비를 이용해 식을 해결하고 누군가가 만든 옷을 입어 의를 해결한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이루어 살며 그들은 종종 외부의 적이 된다.

그렇다면 건강한 까칠함이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줄 수 있을까. 타자와 적정 거리에 있는 오지랖은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우리를 독선의 길로 인도한다. 그것은 그저 측은지심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마음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불신이 원천이기 때문이다. 결국,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작가는 기존의 까칠함과 사뭇 다른 ‘건강한’ 까칠함을 활용할 것을 주장한다.

위와 같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시선을 과하게 신경 쓰다 보면 내가 아닌 타자가 좋아할 만한 모습으로 자신을 가꾸게 되고,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된다. 나르시시즘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게 만들고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길을 걷다 얼굴을 마주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주관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피해 의식이나 과대망상이 돼버린다. 내부의 적은 이렇게 형성되어 나와 끝없이 싸운다.

관심 없는 상대에게 까칠하게 대하듯이 나 자신에게도 똑같이 대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상관없는 사람에게 일어난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내부의 적과 상대해볼 수 있다.

하지만 건강함이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적당함이 중요하다. 나병에 걸리면 통증을 느끼지 못해 신체 일부가 짓이겨져도 인지하지 못하게 되듯이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은 이성보다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주로 후자보다는 전자를 통해 인간관계를 맺는다. 감정을 잃는다는 것은 무한한 평온이라기보다는 인간관계를 여행할 지도를 잃는 셈이다.

시대적 풍조가 개인주의로 옮겨갔지만 우린 여전히 서로 필연적으로 부딪히며 살아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까칠함은 예전의 허물을 벗고 새 옷을 입었다. 멸시 받던 까칠함이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안팎의 적들로부터 자아를 지켜낼 수 있을지는 까칠함을 어떻게 사용하나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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