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장 폴 사르트르

필멸의 존재인 인간에게 영원이란 꾸밈이 붙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신화 속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영원함이란 결코 이룰 수 없는 동경이란 점에서 영원, 불멸, 혹은 완전함과 같은 칭호를 갖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비판자’란 수식어를 가진 사람이 있다. 장 폴 사르트르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대표하던 실존주의는 ‘영원한 비판’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데카르트의 코기또에 우리가 이미 친숙한 것처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역시 그렇다. 얼핏 둘 다 존재를 말한다는 점에서 유사하게 생각될지 몰라도 이 둘은 극명하게 다르다. 진리를 찾기 위한 인식의 과정으로 ‘사유’를 통한 존재를 확립한 데카르트와는 달리 사르트르는 허구적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는 과정으로써, 인간이 부여한 의미를 제거하고 ‘존재’를 인식한다. 이 둘의 존재 인식에 대한 출발선이 정반대에 있다는 사실은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실존주의의 의미를 넘어 사회 모순과 존재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생산해낸다.

주인공 로캉탱은 어느 날 갑자기 구토를 느낀다. 무의미한 대화를 주고받는 인간 관계, 혹은 삶에서 느껴지는 권태감, 그리고 인물들이 가지는 위선적 모습들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난 뒤, 그는 구토를 더 이상 멈출 수 없다. 그것을 넘어서 지금 구토감을 느끼고 있는 ‘나’, 어제를 경험‘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를 의심하며 구토를 경험한다. 모든 사람과 사물에 우리가 부여한 의미를 제거하면,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라 불리는 자음과 모음의 조합은 대체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있는 감각 이외에 나를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지금 나는 ‘실존’하는가 아니면 ‘허구’ 속에 있는가.

그의 실존에 대한 의심은 ‘좌파’ 지식인으로써의 활동, 특히 당시 마르크스가 말했던 인간소외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편이를 위해 만들어 낸 화폐로부터 도리어 인간이 종속되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사르트르의 실존과 직결된다. 실체하지 않는 허구적 자본과 허상의 관계로 구성된 사회·정부에 순종하거나, 종속돼 살아가는 개인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모습인가. 스스로마저 존재를 의심하는 그에게 현실 사회의 모순은 더욱 견딜 수 없는 부조리함이다. 더구나 타의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은 사회와 그것에 순응하는 인간의 모습은 구토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은 역겨움이라기보다는 비진정성 속에 살고 있는 지성인의 고독이자, 실존을 자각한 자가 느끼는 이질감이다. 분명, 사르트르는 쉽게 동조할 수 없는 이상주의자다. 영향력을 가지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현실주의, 그리고 현실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돈키호테 쯤 일 테다. 마르크스가 얘기한 자본과 사회의 모순을 백번 양보해 받아들인다 해도, 한 개인이 가졌던 따스한 기억, 친구, 부모의 의미마저 모순이요, 허구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구토감은 더욱 가치 있다. 모순투성이인 삶에 거침없이 뱉어내는 사르트르의 이질감은 자신의 존재마저 의심하고 비판하는, 완전히 독립한 ‘인간’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실존주의는 우리에게 존재와 허구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삶은 허망하고 의미 없는 것인가? 나를 의심하고 비판하기 전엔,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할 수 없는가? 사실 사르트르는 ‘영원한 비판가’로 남았을지라도, 우리에게까지 그 선택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붕괴 예측은 실패했으나, 자본가로 하여금 착취구조를 변화하게 만든 것처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을지언정, 존재 가치에 던지는 화두와 비판은 우리를 풍성케 한다. ‘영원한 비판가’는 당신의 존재 역시 비판한다. 우린 그의 구토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쉽지 않은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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