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없이 사람은 존재한다만, 어부는 존재하지 못한다. 매일의 기후는 출항의 유무다. 식사는 바다를 위한 준비고, 어획은 연명이다. 어부에게 바다는 삶이다. 나고 죽는 모든 것은 바다에 있다. 84일간의 불행을 겪으면서도 산티아고가 바다를 등지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저항하며 버텨낸다. 누구든, 내 모든 것을, 나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인과 바다는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노인이 바다에서 홀로 대어를 낚는다. 그리고 그것을 바다에 빼앗긴 채 돌아온다.” 지나치게 허무하고, 단순한 이야기다. 인간이 삶과 성취, 고난이나 죽음의 관계로 생각하고 듣는다 해도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진 않는다. 처절하게 발버둥 쳐 얻어낸 노인의 성취가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되는 소설 말미의 장면과 자꾸만 오버랩된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 어떤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1차 세계대전 후의 세대. 대공황과 맞물려 허무함의 상징으로 남은 ‘잃어버린 세대’의 소설은 사실 허무하지만은 않다. 높은 실업률 안에서 기득권에 배척 받아야 했던 이 세대의 인물은, 헤밍웨이는 역설적으로 허무함이 아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했다. 물질이나, 명성이 아니라 ‘삶의 과정’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대어를 낚든, 혹은 그렇지 못하든 상관없이 노인이 보여준 끈기와 인내의 모습은 더욱 많은 것을 말한다. 성공과 실패는 중요치 않다. 두 문장으로 요약된 소설은 사실, 삶과 고난을 넘어 삶과 죽음 사이의 과정을, 의미를 곱씹는 서사였다.

‘위로’의 소설이란 제목은 그것 때문이다. 헬조선이 일반 명사화 된 이곳에서 스스로를 위로할 따듯함을 찾기란 어렵다. 노력이 ‘노오오력’으로 조소의 대상이 되는 시대. 끈기와 인내를 가지면 ‘바보’가 되는 시대. 반짝 유행어였던 ‘존버’는 끈기, 인내의 뜻이 아니라 도박의 다른 이름이었다. 결과가 없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다수의 우리는 방황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잃어버린 세대’가 처했던 상황과 유사하다. 경쟁과 스펙, 금수저, 흙수저 앞에서 작아져만 가는 우리에게 ‘노인과 바다’는 66년이란 시간을 지나 다시금 메시지를 던진다.

혹,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소설을 읽고 위로 받는 건 좋은데, 그건 그냥 ‘자위’일 뿐이잖아? 실제로 산티아고 역시 ‘나는 패배했다’고 애기 했던 것을”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건 무엇에 대한 패배였는가? 명확한 성취를 가져오지 못한 것, 물질로 치환할 수 없는 결과를 얻어낸 것에 대한 실패였지, 그것이 노인의 삶의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물질적 성취로 삶의 성패를 말한다고 생각한다면,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결국 우린 죽음이란 상어에 쫓겨 소유한 모든 것의 뼈만 남는다. 종국엔 결과로써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삶은 그저 과정만으로써 의미 있으며, 그 속에서 투쟁하는 모습만으로 가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잃어버린 세대’의 시기. 패배감. 공허함과 무력감의 시기를 겪고 있다면 이 소설을 읽어 보시라. 산티아고의 늙은 육신과, 밤을 세워가며 낚싯줄을 잡고 인고하는 모습, 상어 떼의 습격에 작살도, 칼도 잃어버리지만 키 손잡이를 뽑아 저항하는 노인을 생각해 보라. 치열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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