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운동은 운동이란 이름을 넘어서는 혁명이다. 구시대적 젠더 위계에 따른 사회전반의 나태함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혁신의 메아리가 퍼지고 있는 것이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시작으로 온 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성 의식에 대한 문제가 만연하다는 반증이다. ▲검찰 ▲문화 ▲연예 ▲종교계를 넘나들며 연일 새로운 폭로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이윤택 감독은 자신의 ‘더러운 욕망’으로 탓을 돌렸으나 문제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가해자는 여전히 미성숙한 성 왜곡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또 피해자는 사회의 미성숙으로부터 2차 피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해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것을 내려 놓겠다’는 말을 했다. 가진 자, 위계의 위에 서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언급이다. 그들은 여전히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편협한 성의식 그리고 그 위에 자리한 사회의 위계질서, 또 그것을 기반으로 한 이들의 인식의 부동성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미투운동이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인 이유가 그것이다.

한국 사회는 젠더이슈, 인권, 사회의식에 있어 후진적 수준에 머물렀다. 과거, 성 문제에 대한 폭로는 ▲연예 ▲정치 ▲종교계를 막론하고 있었지만 가십 이상의 문제, 사회문제로 발전하진 못했다. 하지만 이번 미투운동은 과거,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던 왜곡된 성의식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한 의미를 갖는다. 놀라운 성장의 기간 동안 경제 논리만 비정상적으로 커진 한국사회가 변화하고 있음을, 선진국 진입의 가능성을 현실화 하고 있는 것이다.

3.1절은 일제에 억압에 저항하기 위한 전 민족적 움직임을 기리는 날이다. 대한민국의 해방을 알린 신호탄이기도 했다. 3.1운동이란 말보다, 3.1혁명으로 부르기에 더 적합하다. 4.19혁명은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투사들의 항쟁이었다. 우린 지금 왜곡된 성의식과 위계가 만들어 낸 괴물들과 싸우는 미투혁명의 중심에 있다. 이 젠더의 해방, 해악의 위계로부터 탈피하고, 진정한 평등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혁명이 아니라면 어떤 수식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이젠 침묵하는 방관자, 도피했던 무책임자, 무지로 일관했던 무관심. 모두 이런 왜곡된 사회 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위드유 운동이 반드시 필요한 까닭이다. 위드유는 피해 경험의 동의가 아니라, 성의식 개선에 대한 동의로써 사회에 확장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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