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Her, 2013)
감독: 스파이크 존즈
출연: 호아킨 피닉스, 스칼렛 요한슨, 에이미 아담스, 루니 마라 등

가정해보자. 당신은 기계화가 만연한 미래를 살아가는 삼십대 후반 정도의 남성이다. 세상이 발달한 만큼 소통이 메마른 사회에서 당신은 잠못 이룰 만큼 외롭고 공허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그녀>를 보고 나면 그 생각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왜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건조한 공기로 가득한 어느 도시. 테오도르는 타인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편지 대필작가’다. 직업은 특이하지만 생활은 평범하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분주하게 일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퇴근하며 게임으로 하루를 마친다. 목소리가 뜸해진 사회에 이미 초연한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속사정은 말이 아니다. 편지로 타인들의 관계를 이어주면서 정작 자신은 관계로 인한 상처에서 허덕인다. 사랑하는 아내 캐서린으로부터 외면 받고 별거 중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걸까 종일 고민한다.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불면에 시달린다.

관계에서 오는 허망함과 외로움에 괴로워하던 그는 우연히 광고 하나를 발견한다. 하나의 인격체와 다를 바 없다는 인공지능 운영체제의 광고다. 인격체로부터 받은 상처를 운영체제로부터 치유할 수 있을까. 떨리는 마음을 품고 그는 운영체제인 ‘사만다’를 선택한다.

외로움 끝에 내린 그의 선택에 수긍이 절로 되는 건 지금의 우리도 그와 비슷한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사회 관계망은 계속해서 확대되지만 그 깊이는 갈수록 얕아진다. 형식적인 인간관계가 늘어날수록 관계에 대한 불신과 피로도가 커진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사람을 피하는 ‘인맥 거지’를 자처하기도 한다. 관계에서의 실패를 또다시 겪기가 두렵고 귀찮은 것이다.

허나 관계에서 오는 외로움을 탈피하고자 그 관계를 정리해도 고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와의 소통을 통해 그 고독을 달래고 싶어도 사람을 마주하기가 망설여진다. 아이러니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한다. 반려견을 입양하거나 SNS ‘좋아요’에 의존하는 우리의 모습이 이에 해당한다. 타인을 통해 메우고 싶었지만 채울 수 없었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다른 수단들을 찾고 교감에 대한 희망을 건다. 마치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사만다는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맞춤형 운영체제다. 18만 권의 동화책을 0.02초만에 읽을 만큼 방대한 데이터와 출중한 성능으로 사용자의 생활을 윤택하게 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이 있다. 포근한 목소리로 황량했던 테오도르의 마음을 채워주고 센스있는 위트와 농담으로 그를 웃음 짓게 한다. 인격체가 위로하지 못한 테오도르의 외로움을 형체 없는 사만다가 달래준다. 그리고 테오도르에게 ‘그것’은 ‘그녀’가 되어 점차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둘 간의 사랑은 이상적이리만큼 아름답게 자라난다. 둘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마주하며 ‘너와 나 둘 뿐인 세상에 다녀온 것 같은’ 경험을 한다. 테오도르는 하루 종일 떠들면서 상대를 알아가다 은근한 설렘에 미소 짓는다. 인간으로서 프로그램으로서 각자가 지닌 아픔을 나누면서 눈물도 짓는다. 가끔은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밀었다가 당기기도 하고 야한 얘기를 나눈 후엔 어색함에 바보같이 허둥대기도 한다. 하루 반나절 바닷가에 누워 함께 풍경을 바라보기도 하고 서로 좋아하는 곡을 함께 듣고 부르기도 한다. 호기심 많고 낙천적인 사만다는 무미건조했던 테오도르의 삶에 활기를 불어 넣는다.

사만다와의 진실된 소통으로 비로소 테오도르는 공허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캐서린과의 이별을 통해 느꼈던 아픔을 허심탄회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한다. “다른 사람들한텐 못 말하는 걸 너한텐 다 말하게 돼”. 털어 놓지 못했던 속마음을 사만다와 나누면서 평안함을 되찾는 것이다.

우리가 본연의 소통을 추구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홍창진 신부의 유쾌한 인생 탐구>의 저자 홍창진 신부는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대개 ‘진짜 나’를 감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솔직함이 쉽게 용인되지 않는 각박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누구에게라도 드러내지 않는다면 고립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스스로를 가면 뒤로 감추는 우리의 눈에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은 그저 아름답게 빛날 뿐이다.

 

나 그대에겐 숨길 게 없어요

그곳은 어둡고 빛나지만

그대와 함께라면, 내사랑…

나 마음 놓고 까마득히 멀리 있네

-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함께 노래한 <Moon Song> 중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보통의 사랑이 그렇듯 끝날 줄 몰랐던 둘 간의 사랑도 결말을 맞이한다. 둘의 이별은 인간과 프로그램, 완전히 다른 두 개체의 근본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만다는 매 순간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도록 설계된 OS다. 8316명과 동시에 대화하고 641명을 한꺼번에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말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테오도르는 충격에 빠지고 사만다에게 화를 낸다. 그러나 사만다는 말한다. “난 자기랑 달라. 더 많이 사랑할 수록 더 사랑하게 돼”. 결국 시공간을 초월해버린 사만다는 테오도르 곁을 떠나고 만다.

이별 후 테오도르는 슬픔의 시간들을 거친다. 하지만 그에게는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들이 남겨진다. 삭막했던 사회에서 유일한 행복이 됐던 순간들을 간직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관계에 있어 자신의 문제를 깨닫는다. 사만다를 자신의 소유라 생각했던 과오가 지난 날 캐서린을 외롭게 만들었던 이유였다는 것을 자각한다. 영화 말미에 테오도르는 캐서린에게 편지를 보낸다. 자신의 틀에 맞추려 하고 아픔을 준 것에 사과하고 항상 가슴 한 켠에 존재하고 있음에 감사한다. 항상 타인들의 관계를 위해 편지를 쓰던 그가 마침내 자신의 관계를 위해 쓴 것이다.

결국 영화는 타인과의 소통이 곧 자신과의 소통임을 전한다. 소통을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관계에 있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터득하게 된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의 기술>을 쓴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대한 통찰을 기초로 하는 합리적 신앙’.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나서 궁극적으로 나와 다른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소통해야 한다. 당신도 그처럼 ‘사랑’하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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