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겨울의 문턱에서 항상 나를 기쁘게 하는 엽서 한 통이 있다. 동아리 창립제 참석을 부탁하는 후배님들의 엽서이다. 매년 거르지 않고 보내는 후배님들의 엽서 한 통에는 나를 그 시절 대학생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과 같은 힘이 있다.

엽서가 날아올 즈음, 직장과 집을 오가는 무료한 생활 속에서 하나의 작은 낙이 될 수 있는 드라마를 만났다. 이혼을 한 부부가 대학 시절로 돌아간다는 판타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고백부부’라는 드라마 하나가 중년의 나를 설레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등장인물들이 담고 있는 내적 고뇌나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주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나를 흥분시킨 것이다. 나는 흥분된 마음 속에서 의문이 들었다. ‘왜 대학 시절이 나를 흥분시키는가?’였다. 첫사랑 때문일까? 동기들 때문일까? 사랑, 친구는 지금 이 나이에도 누릴 수 있는 것일 테고 학구열? 지금도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인데 말도 안 된다. 단순히 젊음 때문일까? 젊음이 누릴 수 있는 ▲열정 ▲패기 ▲무모함 ▲직진 ▲도전은 물론 부럽다. 하지만 경험과 연륜으로 이에 못지않은 지금의 삶을 누리고 있는 직장인이니 젊음도 아닐 테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됐다. 참으로 단순하게 ‘동아리’였던 것이다. 인문학부 단대 동아리 ‘해방말뚝’. 내가 몸 담았던 풍물을 치고 마당극을 공연하는 동아리다.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은 나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학교 수업은 안 들어가도 동아리 방에서는 살다시피 했고 매년 행하는 지신밟기와 정기 공연에 목숨을 걸고 덤벼들었다. 방학이면 전수관을 찾아가며 악기를 배웠고 꽹과리 소리와 장구 소리가 듣기 싫다는 사람들을 혐오했다. 심지어 개량한복을 입고 캠퍼스를 활보하며 강의실에도 당당하게 들어갔던 그 젊은 치기는 자다가도 이불을 차게 만드는 부끄러운 기억일 수도 있다. 결과가 언제나 좋게만 다가온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좋지 않았던 것은 오직 성적 뿐이었다. 지금도 억척스럽게 고집하는 생각 중 하나는 그 나쁜 성적과 낮은 졸업 학점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바꾼 ‘가치관’으로 교환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행복한 대학 생활을 보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기저에는 ‘대동’이라는 공동체적 문화가 존재했다. 선배·동기와 함께했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세상을 보는 혜안과 사람에 대한 사랑은 미성년자와 성인의 교차점에 자리했던 나를 성숙한 하나의 인격체로 만들어줬다.

30주년 동아리 창립제. 우리 동아리가 이제 없어질 것 같다는 후배님들의 말을 들었다. 시대와 맞지 않는 풍물 동아리에 들어오는 신입생도 없고 그나마 동아리를 지키고 있던 후배님들도 사정 상 활동을 이어가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안타깝다.

후배님들 얼굴을 보며 그것이 틀리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술자리로 이동해 87학번부터 16학번까지 모여 앉아 이야기를 꺼내놨다. 지금까지 동아리를 지키고 있던 후배님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지켜주지 못하는 선배들의 안타까움. 그리고 풍물 동아리 따위는 설 자리가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든 기성세대. 바로 우리 그리고 그 윗세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더 나쁘게만 흐르고 있는 것 같은 세상에 대한 자조가 담긴 술자리였다. 내가 가슴 속에 담고 있던 그 아름다운 동아리의 잔상이 더 이상 후배님들에게 남아있을 여유가 없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싫었다. 이제는 더 이상 95년도 일 수가 없는 슬픈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수많은 동아리가 없어지고 생겨난다. 동아리니까. 그래도 누군가에겐 큰 의미로, 잊지 못하는 존재로 자리하는것이 동아리가 아닐까. 내가 매년 후배님들의 엽서를 받으며 온몸으로 깊은 떨림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올해의 마지막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다시는 날아오지 않을 엽서의 아쉬움을 담는다. 그리고 나와 같은 학번의 그 시절 이야기들을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대중가요 속에서 찾으려 혈안이 될 지도 모른다.

후배님들 마음 속에도 대학 생활을 회상하며 흥분을 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졸업하는 것은 어떨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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