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동안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와 수능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는 학생에게 한국사를 가르친 적 있다. 그에게 한 국사를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나라 역사를 다시 훑어보고 여러가지 재밌는 이야기들을 조사했었다. 조사했던 재밌는이야기 중에서 조선경제사에서 나왔던 사례가 지금의 우리사회 모습과 꽤나 닯아있음을 전하고 싶다. 

 중국에서는 흔히 ‘꽌시’라고 불리고 서 구권에서는 ‘로비’라고 말하는 단어가 우리나라 조선경제사에서도 등장한다. 바로 인정(人情)이다. 사람사이의 정을 얘기하는 이 단어가 조선경제사에서는 방납업자 들과 지방관 사이의 리베이트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고등학교때 공부했겠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한 학우들을 위해서 이에 대한 설명을 붙이자면, 조선에서는 세금을 특산물 로 내도록 하는 공납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농사기술이 지금처럼 많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집마다 할 당된 특산물을 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 특산물을 대신 구해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이 방납업자였다. 본인이 구하기 힘든 특산품을 대신 구해준다니! 방납업자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 조선 백성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방납업자들의 부패하면서 방납의 폐단이 일게된다. 방납업자들과 그 지역 지방관이 결탁하게된 것이다. 방납업 자는 지방관에게 돈봉투(?)를 건네면서 ‘ 제 물건을 산 사람들의 물건만 받아주십시오’라고 하면 지방관은 ‘걱정하지말게 이게 사람사는 정이지(人情)’라고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방납업자와 지 방관이 결탁면 방납업자는 본인의 물건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아넘길 수 있고 그것을 구입할 능력이 없는 백성들이 다른 물건을 구해서 납부한다고 해도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이미 방납업자의 인정(人情) 을 받아먹은 지방관은 특산물을 납부하러 온 백성에게 ‘특산물의 질이 안좋다’ 등 갖은 꼬투리를 잡아서 퇴짜를 놓았고 결국 백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지방관과 결탁한 방납업자의 특산물을 구입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방납의 폐단을 막기 위해 조선정부는 특산물을 쌀로 내게 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이 방안이 전 국적으로 시행되기까지 약 10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기존 조세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고 개혁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극렬한 반대에 시달렸으며 죽음에 이르렀던 이도 있었다. 지방관과 방납업자 간의 검은돈. 즉 인정이 오고간 역사적 상황과 이러한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해 대동법이 나오기까지의 일련의 역사적 과정은 현재 우리사회와도 많이 닮아 있는 듯하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하 김영란 법)이 시행되기 전에도 우리나라는 사회 전반에 걸쳐 부정청탁이 성행하고 있었다. 굳이 선진국과 비교하는 통계치를 근 거로 들지 않아도 지나가던 아이들에게 ‘ 우리나라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니?’라고 물었을 때 나오는 답변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영란 법 시행여부를 두고 여러 찬반 논의가 이뤄졌던 지난해도 김영란 법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내수시장이 위축된다’ 등의 논거를 들며 극렬히 반대했었다. 그리고 김영란 법이 첫 돌을 맞은 지금. ‘500대 기업 상반기 접대비 15% 감소’,‘ 서울 학부모 85% “촌지 사라져”’ 등의 기사들만 봐도 김영란법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찌보면 인정에 기댔던 일처리방식 예컨대 ‘사업승인을 받으려면 공무원에게 접대를 해야 한다’ 등의 방식들도 많이 수그러진 모양새다. 

 16세기 조선에서부터 현재까지 약 5세 기간 이어져온 인정이란 이름의 부정과 부패. 이러한 관습이 원리 원칙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고지식하고 인정 없는 사람’ 이라는 인식을 달아준 것은 아닐까? 김영란 법이 좀더 수정되고 보완되어 원리와 원칙을 강조하는 이들을 ‘고지식하지만 공정한사람’이라는 인식을 좀 더 굳건히 해주길. 아울러 대한민국 사회가 인정(人 情)보단 공정(公正)이라는 가치를 더 높이 세우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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