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묻자. 이 글을 부탁한 학보사, 이 코너를 읽는 여러분은 뭘 기대했을까? 결론은 뻔하다. “당신들의 성공과 행복을 바란다. 그럼 내 조언을 들으라.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 당신들의 황금빛 미래를 향하여!” 죄송해요. 여러분. 전 그런 말 못해요. 당근이나 채찍질은 기대 마세요. 난 졸업한 지 십년도 안 됐다. 여러분과 기껏해야 열넷 정도의 차이. 강산이 아직 안 변했거나, 고작 한 번 변했다. 큰 차이라면 차이겠지만 글쎄, 문제는 나 역시 매일매시 흔들리고 넘어지고 울고 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넘어지지 않으려면 울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 역시 모른다.
이번 생은 망했다. 다음 생은 바라지도 않는다. 오늘 좀 힘들었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 내일도 어차피 힘드니까. “오늘의 좌절과 실패는 내일을 위한 거름이 될 것이야!” 같은 위로는 안 믿어. 어차피 다 거짓말이니. 내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확실해. 우리의 삶은 우리가 바라는 만큼 더 나아지거나 더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우리는 성공할 확률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존재라는 걸.
이런 실패를 계속하는, 또 계속해 나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포기하면 편한데, 이승이라는 개똥밭에서 계속 구르는 이유는 도대체 왜?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고 또 해나가야 할 실패들이 무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패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들 하는 것이다라는 상투구를 넘어 다들 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했듯 우리는 성공할 확률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고, 당신이 원하는 만큼 당신이 나아질 리는 없다. 고로 우리의 실패들은 무고하며,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어차피 실패한(실패할), 망한(망할) 인생의 의미는 어디 있을까? 지속적이되 무고한, 실패한 인생의 의미는 옳고 그름이라는, 성공과 실패라는 양분법으로는 찾을 수 없다. 우린 모두 ‘다른’ 실패를 하고 있다. 100이라는 세 자리 숫자를 꿈꾸지만 여전히 두 자리 혹은 한 자리에 머무르는 우리는 모두, 다양한 숫자들, 다양한 개체들이다. 실패는 앞으로 있을 ‘성공’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공’이란 앞으로 아마 없을 테니까. 나의 실패와 망함은, 너의 실패와 망함과 다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우린 모두 다른 이유들로 다른 방향으로 다른 울음소리를 내며 넘어지고 쓰러진다.
선배라 해봤자 난 여러분의 삶에 큰 관심이 없다. 여러분이 날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말해 줄 순 있다. 조금 더 실패를 많이 해 본 이의 뻔한 술자리 위로를. 하지만 먼저 살아간 이의 말이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어차피 우린 서로 다른 개똥밭에서 서로 다른 망한 인생이므로. 역설적으로 그래서 나와 당신은 의미가 있다. 서로 보이지는 않지만 각자 뭐라도 꿈꾸고 굴러가며 망해 가고 있으니까. 즉 우리 모두가 실패와 망함의 연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혼자 망하면 쓸쓸하잖아. 근데 혼자가 아니잖아. 다들 망해 가잖아. 그걸 아는 게 그나마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이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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