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 죽여주는 여자 (The aBcchus Lady, 2016)
감독 : 이재용
출연 : 윤여정, 윤계상, 안아주 외

‘죽여주는 여자’의 주인공 소영(윤여정 분)은 제목만큼 노골적인 직업을 가졌다. 노인 남성들에게 박카스 한 병 건네며 몸을 파는 이른바 ‘박카스 할머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쳇바퀴 같은 그녀의 삶이 갑작스럽게 요동친다. 다른 노인들로부터 본인들을 죽여 달라고 부탁 받은 것이다. 죄책감과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 그대로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법을 기준으로 보면 그녀는 엄벌해야 할 가해자다. 성매매에 가담하고 두 명을 살인했으며 한 사람의 죽음을 방관했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의 삶을 진짜 현실을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녀는 매정한 사회의 희생양이자 엄연한 피해자다.

 

“다들 손가락질하지만 나 같이 늙은 여자가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일이 많은 줄 알아?”

 

영화는 극사실주의에 가깝다. 실제로 종로 3가와 탑골공원에는 수많은 소영이 존재한다. 올해 초 싱가폴 뉴스채널 CAN에서 ‘대한민국의 할머니 매춘부’라는 짧은 다큐멘터리를 공개했다. 영상 속 주인공인 박 모 할머니는 심각한 신경통을 앓는 독거노인이자 박카스 할머니다. 그녀에게 매춘을 하는 이유를 묻자 그녀는 고백한다. 약값을 벌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할머니들이 몸을 파는 이유는 오로지 살기 위해서다.

경제 강대국 대한민국은 노인에겐 가장 불행한 나라다. 지난해 통계청의 연구 결과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이 47.7%에 달했다. OECD회원국 평균에 4배에 달하는 수치다. 심각한 수준의 노인 빈곤 현상은 마땅한 대책 부족에서 기인했다. 빈곤층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모호한 지원 방식으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연금에 의존하지만 각자에게 돌아오는 금액은 기초 생활비에도 못 미친다. 저축금으로 긴 여생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이로 인해 노인 두 명 중 한 명은 빈곤에서 허덕인다.

보호받지 못하는 노인은 살기 위해 다시 일터로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들을 위한 마땅한 일자리는 없다. 노년층에게 윤택한 일자리를 내어주기로 약속한 기업은 비효율적인 인력인 노인들을 기피한다. 비교적 쉽게 해낼 수 있는 단순 노동업은 청년 실업자들에게 먼저 돌아간다. 그나마 남는 실버 택배나 경비원과 아동지킴이 등의 일은 불어난 노인 인구로 인해 자리가 부족하다. 끝내 남는 일은 폐지를 줍거나 변기 닦는 일이다.

박카스 할머니를 자처한 이유에 대해 소영은 이렇게 말한다. “빈 병이나 폐지 줍는 건 죽기보다 싫더라구”. 자원순환연대에 따르면 올해 폐지 줍는 노인의 인구수가 175만명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새벽 네 시부터 제 몸보다 무거운 수레를 끌며 하루 종일 쓰레기를 줍고 10만원을 번다. 하루가 아니라 한 달에 말이다.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사람에게 먹고 살 방법말고 중요한 게 있을까. 먹고 살기 위해서 소영의 선택은 어쩔 수 없었다.

소영의 ‘이유 있는’ 선택은 하나 더 남았다. 고민 끝에 대리 살인을 결심한다. 상대는 자신의 고객이었던 세비로 송(박규채 분)과 종수(조상건 분)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배변 조차 가누지 못하는 세비로 송은 가족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치매에 걸린 종수는 아무도 찾지 않는 허름한 방에서 홀로 살아간다. 두 사람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려졌다. 다른 듯 닮은 그들의 처지에 연민을 느낀 소영은 그들을 죽여준다.

 

“저 세상에선 좀 편해지셨을까요? 좋은 데로 가셔야 할 텐데…”

 

사회에서 소외 받는 노인들은 몸 만큼이나 마음의 병을 앓는다. 질병과 퇴직으로 인한 사회적 능력과 경제력 상실로 자존감은 바닥까지 추락한다. 배우자와 친구들의 죽음은 불안감과 우울감을 가중시킨다. 하나의 인격체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기 어려운 그들은 삶을 영위할 이유를 상실한다.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복지와 교육의 부재는 고민만 더욱 깊어지게 만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믿었던 가족들 마저 외면한다. 37개국을 대상으로 노인 돌봄 의식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는 31위라는 처참한 순위를 기록했다. 중장년층이 노인에 대한 책임을 기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회적 상황을 고려할 때 당연한 결과다. 고용 불안정과 가계 부채로 제 식구 먹여 살리기도 벅찬 가장에게 부모의 존재는 부담이 된다. 노인은 짐짝으로 전락했다.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관심 받지 못하는 노인들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OECD 회원국 노인 자살률 1위 자리는 앞으로도 부동할 전망이며 이를 방지할 사회안전망은 마련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소영이 송씨와 종수를 죽여주지 않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좁은 방에서 홀로 죽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진실에 별 관심 없어. 다 지 듣고 싶은 얘기나 듣지”

 

영화는 단지 노인들의 사회를 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가 등돌린 약자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조명한다. 소영의 집 주인이자 트랜스젠더인 티나(안아주 분)와 한 쪽 다리가 없는 도훈(윤계상 분)과 외국인 노동자 아딘두(그라시아 분) 그리고 코피노 민호(최현준 분)까지. 소영의 이웃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다.

그러나 소영은 그들을 위해 베푸는 것에 서슴없다. 산부인과 의사인 아빠로부터 버림받고 엄마와 헤어지게 된 민호를 집으로 데려와 손자처럼 보살핀다. 죽음을 도와준 댓가로 받은 백만 원 중 90만 원은 모금함에 기부하고 나머지 10만원으로 이웃들에게 장어를 먹인다. 울부짖는 길 고양이마저 지나치지 않는다.

그녀가 그토록 희생하는 이유는 불분명하다. 어린아들을 입양 보낸 죄책감 때문일 수도 동질감에서 비롯된 연민일 수도 있다. 허나 중요한 것은 그녀의 태도다. 그녀는 자신처럼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한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으로 돕는다. 매 끼니 챙겨 먹기도 벅찬 처지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잔혹한 현실은 소영의 선행을 묵살한다. 사회가 바라보는 그녀는 그저 매춘부에 살인범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정에 선처 없는 사회는 그녀를 교도소에 집어 넣는다. 이 와중에 그녀는 말한다. “차라리 잘 됐지 뭐. 거기 가면 세 끼 밥은 먹여주잖아요." 감옥살이 마저 다행으로 여기는 이 여인에게 법이라는 윤리라는 잣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속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더럽고 추악한 여자라며 소영을 손가락질 할 것이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굶어 죽기 직전인 상황을 받아들일 것인가 몸을 팔아서라도 이겨낼 것인가. 죽음이 희망인 노인을 방치할 것인가 보내줄 것인가. 이 질문 앞에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결국 사회는 모두에게 고민을 떠 안겼다. 가려진 사정을 외면한 채 그들을 보호할 합리적인 방법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그 고민은 더욱 깊어질 것이며, 그럴수록 노인들의 불가피한 선택 또한 계속될 것이다. 이제는 소영에게 죄를 뒤집어 쓴 사회가 책임져야 할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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