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의 학보사 기자 생활 동안 4번의 마감을 거쳤다. 11편의 기사를 쓰며 알게 된 필자의 문제는 추상적이고 과장된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실을 전달하는 목적에 적합하지 않은 기사를 써냈다. 문학작품을 읽으며 보았던 감성적인 표현과 기교가 들어간 글을 멋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문장들이 퇴고 과정에서 사족과 군더더기로 평가됐다. 고심해서 쓴 글이 안 좋은 평가를 받자 마음이 아팠고 학보사라는 곳이 필자와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동안 써왔던 글과 다른 익숙하지 않은 글쓰기였기에 올해 개강
논술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해 글쓰기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새로운 글쓰기를 원했던 시기에 학보사 수습기자 모집공고를 보고 바로 지원서를 작성했다. 결국 3대 1의 경쟁률을 뚫으며 본보의 수습기자가 됐다. 수습기자 교육을 한 달가량 받고 나서야 본격적인 기사 작성에 투입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신문에서의 글쓰기는 유달리 어렵게 느껴졌고 수없이 고민해야 했다.그 이유는 필자가 글을 써오던 방식에 있다. 필자는 주장을 드러내는 글쓰기에 익숙했고 사실을 전달하는 글쓰기 경험은 현저히 부족했다. 글로써 주장을 드러낼 때 이미 필자가
필자는 꿈이 없는 사람이었다. 막연한 꿈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꿈이 없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공부에 열정이 없던 터라 당연히 좋은 대학에 갔을 리도 없다. 어느덧 스무 살이 되고 그저 성적에 맞는 대학에 입학했다. 자연스럽게 학벌 콤플렉스가 내게 찾아왔고 편입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것이 우리 학교에 오게 된 ‘멋없는’ 과정이다. 편입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학보사에 지원했다.하지만 학보사 활동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누구나 읽기 쉬운 기사이길 논리적인 기사이길 더 좋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기자를 꿈꿨다. 그렇기에 대학교도 기자에 도움이 되는 정치외교학과에 지원했다.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께서 정치외교학과는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취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학과에 지원하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기자가 되고 싶다는 나의 의견은 확고했기에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치외교학과에 지원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에 신종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우리 학교는 전면 비대면을 선택하였다. 나는 그렇게 ‘코로나 학번’이 됐다.본가가 수원
벌써 마감일이 다가온다. 매번 마감일은 후회를 불러온다. 아 조금만 빨리 인터뷰를 요청했으면 이렇게 촉박하지 않을 텐데. 정말 이게 정말 필요한 기사일까. 결국 이번 글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눈 꼭 감고 완성되었다고 우겨본다. 그렇게 글을 들고 간 마감일의 학보사 실은 마치 응급실처럼 분주하다. 구급차를 타고 실려 온 환자처럼 곳곳이 상처 난 내 글을 편집장과 다른 기자들이 열심히 치료해준다. 촌각을 다투며 타닥타닥 쌓여가는 글자들은 여기저기 흉터가 나 있고, 아쉬운 대로 마감한 글은 그렇게 학보에 오점을 남긴다.그렇게 맘 졸이길
아주대에 입학해 내 꿈을 위해 한 첫 활동은 아주대학보사 지원이었다. 학창 시절 때부터 기자를 꿈꿔 여러 기자단 활동을 해보았기에 큰 자신감을 가지고 올해 4월 지원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원하던 아주대학보사 수습기자가 되었다. 수습기자로서 가장 처음 하게 된 일은 기자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편집장의 주도 하에 기사를 쓰는 과정과 기사 작성법을 배웠으며 기자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익혔다. 그 후 신문 발행 회의에 참여해 다른 기자들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아주대학보를 만들어가고 있다.신문을 만든다는 건 단순히 글만 쓰면 되는 줄
중학교 때 장래 희망을 적으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망설임 없이 기자라 답했었다. 나에게 기자란 선망의 대상이었다. 세상의 여론을 이끌고 사람들을 글을 통해 설득시키고 가끔은 그 높아 보이는 정치인들을 펜만으로 제압하고 그들은 학창 시절 나의 영웅들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다양한 기자 활동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직업이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은 직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말한 영웅들처럼 사는 기자들도 있지만 반대로 ‘기레기’라는 단어를 만들어 기자라는 직업을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인식으로 만드는 기자들도 많이 있었
메신저란 무엇일까? 요즘 사람들은 카카오톡을 먼저 떠올리지만 메신저는 본래 메시지를 전하는 이를 의미했다. 나는 학보사에 들어온 후 나의 역할을 ‘메신저’로 규정했다. 도서와 신문을 좋아하던 문서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다른 위치에 서보니 처음엔 무게감만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일기란 무엇일까. 또 우리 지면에 이 일기를 써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밤새 고민해본 결과 취재 과정에서 겪은 여러 이야기들을 마음껏 써보자는 것 그리고 어제를 거울삼아 내일로 나아가자는 우리 기자들의 다짐을 엮고 내일로 나가보자는 것 이렇게 두 갈래가 나오지 않
우리 학교에 입학한 후 나는 영어 통번역과 미디어라는 두 갈림길에서 어떤 시장을 향할 것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편입을 하고 복수 전공을 바꿔보며 수년을 보내고도 나의 진로는 “확실함” 앞에서 맴돌았다. 잘해온 것과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것 사이에서 미디어는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야였다. 학보사 기자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막연히 고민의 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을 얻었다. 미디어 관련 일을 해보다 보면 답에 가까워지지 않을까?그렇게 취업과 가까워지고 있는 나이 24살에 학보사에 합격해 수습기자로 기
축구를 좋아해 지하철이나 집에서 종종 축구 관련 기사를 보며 기자라는 직업에 관심이 생겼다. 2021년이 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겠다는 결심을 한 후 학보사에 지원해 수습기자가 됐다. 주변 반응은 떨떠름했다. 학보사를 경험한 친구들은 ‘너 그거 하면 한 달 하고 그만할 거 같은데?’라는 반응을 보였고 다른 친구들은 ‘네가 무슨 기자야’ 하며 핀잔을 주었다. 이런 말을 들으니 오기가 생겼다.649호에선 아인전 관련 보도 기사와 역사 속 오늘 기획 기사 그리고 ‘아주대의 스케치북’ 코너를 개설해 기사를 작성했다. 기획 기사는 자료 조사
초중고 12년 학교에 다니며 방송국과 신문사 견학을 수없이 가봤다. 마감 시간을 맞추기 위해 큰 시계를 걸어놓고 분주하게 일하는 모습은 멋있어 보였다. 이후 뉴스를 챙겨보며 기자라는 직업에 빠져들었고 존경하게 됐다. 학교에 입학한 후 어떤 동아리와 소학회에 들어갈지 고민하던 중 수습기자를 모집한다는 글을 봤다. 기자라는 직업을 존경했고 고등학교에 다니며 학급신문을 제작한 경험이 있기에 망설이지 않고 지원했다.수습기자 경쟁률이 높아 2차 과제였던 면기획 작성을 하면서도 떨어질까 봐 겁을 먹었었다. 하지만 아주대학보 수습기자에 합격했다
'학보사 기자를 모집합니다.' 학교 공지사항을 내리다 우연히 본 문장이다. 한창 블로그에 글을 쓰는 재미에 살고 있던 때인지 교내 기사를 쓴다는 것에 호기심이 갔다. 지원서를 썼고 얼마 뒤 학보사 수습기자가 됐다.학보사 일을 처음 시작하게 된 종강호인 648호. 2020년도의 마지막 신문이면서 나의 첫 시작이었다. 9개의 보도와 기획을 쓰고 고쳤다. 처음부터 완성된 기사를 쓰기로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았다. 반복되는 수정 끝에 글이 완성됐다.648호의 문화면을 쓰기 위해 학교 앞 카페와 동네 카페에 직접 방문했다. 카페
이번 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19(이하 코로나 19)는 기자 활동을 하는 것에 큰 타격을 안겨 줬다.지난 학기 학사 운영은 코로나 19 확산에 대해 신속한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개강부터 수업 및 시험 진행 그리고 학교 행사까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개강 연기에 이어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이뤄졌다. 우리 학교는 재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는 것에 있어 운영 방안이나 플랫폼 구축 등에 있어 미숙했다. 학생회를 포함한 모든 학우는 다소 늦는 학교의 공지에 불만이 가득했다.이번 학기 개강일까지도 코로나 19의 확산
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로 많은 신입생이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고 집에 머물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 활동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과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학보사 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취재를 위해 교수님께 전화를 걸며 사회생활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교수님께 처음 전화했을 때 몇 번 신호가 가더니 음성 메시지를 남겨달라는 말이 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6번 정도 전화를 걸었을 때 겨우 교수님과 연결될 수 있었다.“제가 바빠서 전화를 계속
얼마 전 기억에 남는 책 출판 광고 하나를 읽었다. ‘이번 책은 마른 수건에서 한 바가지 물을 짜낸 결과물입니다’라고 쓰인 추천사가 그 책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기사를 쓰는 것도 ‘마른 수건에서 물을 짜내는 일’이다. 보도와 학내 기획은 소재 선정부터 취재까지 모두 학교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학내 이슈들은 한정적이어서 소재 찾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주변을 수소문해 취재원을 찾는 일은 더욱 만만치 않다. 늘 다양하고 적절한 취재원을 찾아 인터뷰하는 일은 상당한 수고가 필요해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찾기 쉬운 정보를 찾는 것에
스스로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가능한가. 다소 난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다르게 말하면 자신을 규정하는 경계의 범위를 늘리겠다는 말이다. 가장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예시는 청소다. 우리는 청소를 하면서 방을 정리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정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철저히 일상적인 일에서 좌절한다. 늦잠을 자서 수업을 놓치거나 해야 할 과제를 미루거나.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탓한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이유는 그 일들
필자는 다양한 종류의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동기가 돼서 아주대학보사에 들어오게 됐지만 실상은 쉽지 않았기에 다사다난한 생활을 지내왔다.지난해 하계 방학부터 시작해 2학기에 들어서며 수습기자의 활동을 진행하게 됐다. 필자가 수습기자로서 발행한 첫 신문인 627호를 준비할 때 보도 기사와 여러 코너의 플로우차트를 쓰는 것에 굉장히 골머리를 앓았다. 보도 기사의 플로우차트를 처음 쓸 때는 기사의 구성과 중심문단 작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이에 전 편집장의 조언으로 무난한 역피라미드 형식을 갖추며 학우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중
부편집장의 역할을 준비하고 있는 요즘 나의 수습기자 시절을 떠올려본다. 나는 소학회와 동아리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학생회에도 소속돼 있었으며 각종 술자리에는 절대 빠지지 않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학보사에 들어온 이후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마다 주구장창 이어지는 회의에 참석하고 이틀 밤을 새며 이어지는 마감 일정을 소화하느라 내 일상에는 대대적인 변화가 따랐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나는 ‘나 개인이 지겹도록 피해를 보면서도 우리 학교를 위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참으로 부끄러운 위안을 했던 것 같다.하지만 학보사에서 4계절을 보낸
‘ㅇ아ㅇ님의 경우 이론상 내년 2월이 가장 위험하다’지난 달 배우 유아인의 트위터에서는 설전이 오갔다. 한 네티즌은 ‘유아인은 멀리서 보면 좋은 사람이지만 친해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막 냉장고 열다가도 채소칸에 애호박 하나 덜렁 들어 있으면 가만히 들여보다가 나에게 혼자라는 것은 뭘까’하고 물어볼 것 같다는 글을 올렸다. 이에 유아인이 ‘애호박으로 맞아 봤음?’이라는 답글을 달면서 이번 사건이 시작됐다.이후 쏟아지는 사람들의 비난과 답글에 유아인은 일일이 답글을 작성하며 맞대응했다. 이번 설전을 통한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다
“이 xx 당장 폐업시켜” - 윤홍근지난 5월 12일 BBQ 윤홍근 회장이 한 가맹점의 주방을 둘러보는 것을 저지당하자 ”이 xx 당장 폐업시켜”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이에 모자라 불공정행위로 해당 점포를 폐업에 이르게 까지 했다.BBQ와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 회장‘님’들의 갑질 사건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취업난과 과열된 창업시장 속에서 자영업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브랜드 가치가 높은 프랜차이즈 사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과포화 된 프랜차이즈 시장 속에서 개인 사업을 한다는 것은 큰 도박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