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불만족은 결핍에서 비롯한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더욱 집착하는 특성 탓에 모든 인간은 살아가며 끊임없이 결핍을 마주한다.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상으로 인해서도 사람들의 결핍은 점점 더 심해져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하지 못할 결핍이라고 인지하는 순간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직면 혹은 도피뿐이다. 우리는 둘 중 무엇을 선택해야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나’ 또한 결핍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희귀 질환 때문에 변형된 뒤틀린 발의 모양은 결핍의 시작이었다. ‘나’의 질환은 아직 치료제가 없었기에 더
세상이 파편화되고 개인화되면서 현대인들은 다양한 ‘관계’로부터 야기된 스트레스로 인해 고독을 택했다. 그러나 고독을 택한 사람들이 마주한 건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색의 시간이 아닌 외로움과 고립이었다.캐럴라인은 아무런 사교 활동 계획이 없는 고독한 밤을 보내고 있다. 만날 사람도 갈 곳도 없다. 문득 내일 하루도 혼자서 잘 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혼자 있다는 안도감에 막연한 압박감이 밀려 들어온다. 그 압박에 못 이겨 친구들과 약속이라도 잡을까 생각하면 익숙해진 고독은 어느새 고립의 목소리가 돼 귀에 대고 이렇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이런 말은 허울뿐인 소리로 여겨진다. 사람에게 상처받은 경험 때문일까? 그저 삶에 지친 것일까? 인생은 혼자라는 말이 교훈이 된 세상이다. 아이를 잃은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부부가 있다. 아내는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살았고 이는 때때로 남편을 향한 증오로 표출됐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했지만 아내의 모든 감정을 받아주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관계가 나아질 수 없다고 비관하기에 이른 부부에게 핀란드 출신의 여행자 마리가 찾아온다. 부
우리는 모두 과거를 추억하고 때론 후회하며 살아간다.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든 것이라며 지나온 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과거보단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가라고 말하며 이를 ‘미래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나’와 지민은 미래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미래를 기억하기 전의 ‘나’와 지민은 1999년 현재에서 과거에 얽매어 동반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미래에서 현재의 원인을 찾으며 그들의 1999년은 완전히 뒤바뀐다. 미래에서 찾은 원인은 20년 후에 결혼해 부부로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가정이
“사형 폐지론자의 눈에는 범죄 피해자가 보이지 않는다” 사요코는 자신의 책 첫머리에 이렇게 남겼다.11년 전 어느 날 사요코는 저녁거리를 사러 집을 나섰다. 평소와 달리 딸은 함께 나서지 않았다. 이날은 사요코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 사요코가 집을 비운 사이 딸이 강도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사요코와 남편은 졸지에 살인 피해자 유가족이 됐다. 1심은 범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부부는 물론 검찰도 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게 2심 재판이 진행됐다. 범인의 발자국과 딸의 몸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살인의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을 살아가며 타인의 평가나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삶의 중심이 흔들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생의 우선순위는 저마다 다르기에 인생을 저울질 할 수 없다는 것이다.떠돌이 방랑자 ‘크눌프’는 정해진 거처와 직업 없이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는 어디에도 자신을 구속하지 않으며 시간에 몸을 맡겨 세상을 만끽한다. 그의 밝고 유쾌한 성품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속 기쁨과 행복을 선사한다. 또한 그들의 행복한 미소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다.하지만 크눌프의 주변
내 삶의 무게가 타인에게 치우쳐져 있지는 않는가? 정신분석의인 앤서니 스토는 ‘자아실현은 타인과의 상호작용보다 자신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자아실현은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다.현주는 다른 형제자매들과는 달리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다. 고3 동생과 군 복무 중인 오빠를 이유로 한 어머니의 반대에도 현주와 아버지는 둘만의 유럽 여행을 강행했다. 이후에도 아버지의 편애가 계속되자 동생은 떠났고 어머니도 이혼 후 동생을 따라갔다. 오빠 역시 조선소에 취직해 지방으로 내려갔다.아버지와의 특별한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아무도 안 오고 아무도 안 떠나고 참 지겹군” 이 시대에서 ‘기다림’은 곧 삶이고 계속해서 반복된다.나무 한 그루밖에 없는 황량한 곳에 중년의 두 남자가 서 있다. 두 남자의 이름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이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다. 두 사람은 고도가 누구인지 어떤 인물인지도 모른 채 마냥 기다린다. 기다리고 있는 도중 한 소년이 이 둘을 찾아와 “고도가 내일은 꼭 온다”라는 말을 전하고 떠난다. 이 둘은 그 약속을 믿고 다음 날 그 장소에 나가지만 고도는 역
노력하는 청춘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의 눈물을 유발한다. 나이 든 사람들은 밤낮 없이 입시나 취업 준비에 열중하는 청년들의 모습에 “아프니까 청춘이다”며 자신의 과거를 추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당사자인 청년들이 원해서 했다기보다는 대학에 진학해 취업에 성공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에 떠밀린 경우가 다반사다.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는 가끔 우리에게 수많은 압박감을 부여한다. 심지어 누군가는 사회가 정한 선에 부합하지 못한 본인의 모습에 비관해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사바나는 이런 사회가 부여하는 “해야만 한다”에서 벗어나 자유로워
화려한 조명 아래 수많은 팬의 환호를 받는 연예인을 우리는 이상적으로 바라보곤 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연예인들의 자살은 화려함에 감춰진 그들의 어둠을 부각한다. 우리는 매 순간 양가적인 상황을 마주한다. 행복의 이면에는 불행이 존재하고 빛은 어둠의 뒤에서 찾아온다. 우리는 이런 양극단의 단어 사이에서 시소를 타듯 살아간다.진진의 이모도 그랬다. 화목하고 유복한 가정에서 여유롭게 취미생활을 즐기는 그녀의 삶은 누구나 이상적으로 바라볼 만했다. 특히 시장바닥에서 내복을 팔며 하루하루 삶을 이어 나가기 급급한 쌍둥이 언니인 진진의 엄마와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한다. 빠른 토끼가 압도적으로 앞서자 토끼는 방심하며 중간에 잠을 잔다. 하지만 거북이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기어가 토끼를 제치고 승리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게으른 토끼가 아닌 성실한 거북이가 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신영복은 이를 비판한다. “거북이를 얕보고 잠을 잔 토끼도 나쁘지만 잠든 토끼 앞을 살그머니 지나가서 1등을 한 거북이도 나쁘다”며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는 거북이도 토끼의 자세도 아니라고 역설한다. 신영복은 “잠든 토끼를 깨워서 함께 가는 거북이가 되자”는 더불어 삶을 제안한다. 하
그 사람에게 친절히 보였을까. 말실수를 하지는 않았을까. 우리는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스스로 검사하곤 한다. 가족은 거의 모든 검사에서 자유로운 사이다. 대부분 가족을 가장 편한 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편했기에 서로에게 무신경했고 말투는 무뚝뚝하게 변해갔다.책의 주인공 ‘옥미’도 그렇다. 그녀의 남편은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유일한 가족인 딸과는 왕래가 거의 없는 편이다. 생각해보면 멀어질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옥미는 딸이 키우던 닭을 허락 없이 다른 곳으로 보냈고 딸에게 피곤하다는 이유로 짜증을 내기도 했다. 결혼 후 거의
최근 ‘더 글로리’나 ‘모범택시’와 같이 복수를 다루는 콘텐츠가 흥행하고 있다. 대중은 용서로는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으며 복수만이 피해자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우아한 거짓말’은 학교 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그렇다면 과연 책 속에서 가해자를 용서한 피해자는 구원받았을까. 우아한 거짓말은 밝고 착했던 막내딸 천지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시작한다. 엄마와 언니 만지는 어른스러운 아이라는 믿음 아래 가려져 있던 천지의 아픔을 알게 된다. 천지는 목을 맬 때 사용했던 줄과 같은 붉은 색의 털
집으로 들어가는 길. 현관문을 지나 다가간 엘리베이터 앞에는 몇 층에 사는지 모르는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와의 어색한 눈맞춤 뒤에 정적만이 흐른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를 따라가 각자의 층수를 누른 뒤 공허한 침묵 속에서 괜스레 핸드폰을 켜 시간을 본다. 엘리베이터에서 쫓기듯 내려 들어간 집에서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만을 남긴 채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타인의 방’은 단절된 사회 속 고독이라는 방 안에 갇힌 ‘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파트라는 공간 속에서 이웃과 가족과의 단절을 경험한 ‘그’는 아무도
인간은 도피성 동물이다. 힘든 상황이나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어디론가 도피하는 것을 택하기도 한다.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꽤나 효과적이기 때문일까? 잠수 이별이나 범죄자의 해외 도피와 같이 극단적인 도피는 아니더라도 알게 모르게 다양한 방법으로 도피처를 찾는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에 나와있듯 우리는 도피처 중 하나로 종교를 택하기도 한다. ‘파이 이야기’의 주인공 파이는 태평양에서 조난을 당해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호랑이와 함께 표류한다. 식량
삶에는 거짓이 가득하다.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짓이 필요하다. 연락을 닿지 않던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을 때 “넌 잘 지내고 있니”라는 말에 우리는 가끔 뭐라 답해야 할지 고민한다. 잘 지내기도 동시에 잘 지내지 못하고 있기도 한 당신은 결국 대부분 슬쩍 웃어보이며 “잘 지내”라는 말을 뱉을 것이다. 이 말은 진실이지만 동시에 거짓이다. 진실 섞인 거짓을 말하는 이유는 굳이 상대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도 않으며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사회의 흐름이 원활하게 흘러가도록 나를 잘
당신은 스스로가 게으르다고 생각하는가. 열 시간을 일했음에도 한 시간 더 일하지 못한 본인을게으르다 생각하는 당신에게 이 책은 당신이 게으름이라는 착각에 빠진 것이라 말한다.이 모든 건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꾸며낸 것이다. 필자는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발생한 주요한 요인 중 하나로 직업 소명설을 든다. 중세 시대 직업적 성공이 신의 구원 증표라 믿었던 청교도인들의 신앙은 직업적 성공을 이루지 못한 이들을 게으르다며 비판했다. 이는 개인의 생산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정신으로 이어졌고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굳어졌다.한병철
커피 한 잔과 아침 신문을 즐긴 뒤 옷을 입고 출근 준비를 마쳤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점심으론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은 어느 날이었다. 구보 씨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그는 하루 동안 약 54kg의 자원을 소비했고 자신이 세상에 끼친 영향을 몰랐을 뿐이다. 모두가 한 번쯤 경험 해 봤을 흔한 날이지만 우린 그 하루가 만들어 낸 막대한 양의 쓰레기를 인식하진 못한다.우리는 구보 씨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일상을 당연하게 영위하고 있다. 일회용 컵에 음료를 마시면 쓰레기가 만들어진다는 마음 한 켠의 불편함은 있지만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에는 다양한 유형의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하 공시생)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공무원 시험(이하 공시)을 준비하는 이유가 공직에 근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현실 사회의 공시생들도 마찬가지다. 2019년 취업포털 ‘커리어’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공시생 중 0.8%만이 공직에 뜻이 있어 공시를 준비한다고 응답했다.N가지의 것을 포기하는 세대라는 의미의 N포 세대라는 신조어도 있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하는 3포 세대부
당신은 유튜브를 얼마나 신뢰하는가? 유튜브와 같은 뉴미디어는 기존 기성언론의 역할을 대체하며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녹아들었다. 누구나 정보의 생산자가 될 수 있는 뉴미디어의 특성상 가짜뉴스에 대한 위험성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저자는 사람들이 가짜뉴스를 수용하고 이를 근거로 비합리적인 의견을 형성하는 현상이 뉴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해 더욱 심각해졌다고 주장한다. 이는 뉴미디어에 대한 신뢰도가 지나치게 높거나 가짜뉴스의 존재 및 심각성에 대한 인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인지편향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가짜를 진짜로 믿도록 만들기 때문이다